겨울이 가는 소리
1.
요즘 나는 근육 운동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소위 핼쓰라는 걸 하고 있는데, 어쩐지 핼쓰라는 영어 명사에 우리말 동사형 어미 '하다'를 붙여서 표현하는게 어색해서 나는 그냥 근육 운동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어쨌거나 근육운동을 요즘들어 갑자기 시작한건 아니고, 작년에도 줄곧 클럽에 등록을 해놓고 있었지만, 근래에 들어서야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수영이나, 테니스 혹은 태권도나 권투처럼 실용적인 운동을 하는게 아니라 근육 운동을 하는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에 첫번째는 종종 허리가 아팠던 나는 여기 저기 병원과 유명하다는 한약방을 전전한 끝에 허리쪽의 근육량이 보통 남자에 비해서 적다는걸 알게 되었다. (신은 내게 허리쪽의 근육을 조금 빼내어 허벅지에 잔뜩 몰아주신 모양이다.) 그래서 체중이 불거나 소위 노가다삘 나는 일을 하게 되면, 예컨대 선택에서 짐을 좀 나른다든지 하는,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에 당당하고자 꽂꽂히 선 자세로 세수를 하셨다던 단재 신채호 선생마냥 허리를 굽혀 세수도 하지 못하는 21세기의 애국 저질허리 청년이 되곤 하였다.
이런 고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양의사와 한의사들은 허리 근육 운동을 권하였다. 그래서 근육운동을 통해 허리를 강화하고자 하는데 당장 급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는 카메라 장비를 풀 세트로 들고 걸어서 돌아다니보면 허리는 물론이거니와, 어깨와 가슴등, 안아픈 곳이 없다. (아, 물론 허리에 있어야할 근육을 상당량 확보하고 있는 다리는 조금도 무리가 없다) 그래서 상체 근육을 강화시켜서, 더 무거운 장비를 메고 다녀도 거뜬해지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약간의 또 다른 이유를 덧붙이자면, 운동을 하다보니 내 몸에 이런 근육이 숨어있었나? 싶은 호기심이 생겼고, 이왕 시작한거 내 몸뚱아리에 붙은 근육과 조우라도 해보고자 하는 측면도 있다. 가슴 근육이라던가, 이두 같은 근육이 모양을 잡으면 웬지 내가 맨손으로 공룡을 때려잡던 원시인이 된 기분이 드는데, 그게 썩 괜찮은 기분을 만들어준다.
또, 런닝 머신위에서 뛸 때는, 언젠가 내 지갑을 훔쳐가는 용감한 쒜끼를 만나게 되면, 세상의 절반을 돌더라도 끝까지 쫓아가서 뒈지게 아구창을 돌려줄만큼 달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정말로 한번쯤 그래보고 싶은 욕구가 불쑥 불쑥 올라오면서 한 새끼 걸리기만 해봐라...하는 심정이 된다.
물론, 돈자랑, 힘자랑 몸자랑 하는게 세상에서 제일 꼴보기 싫은 거니까 자제할테지만말이다. 더구나 나는 이미 깽값으로 상당히 날려먹은 전과가 있어서 더 이상 힘 쓰면 안되는 처지이기도 하다.
뭐, 각설하고 여하간 나는 근육운동장에 다니고 있는데 최근 들어 우리 클럽에 사람이 부쩍 늘었다. 쫄 타이즈에, D컵 뽕브라를 메단 아가씨 트레이너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최신형 운동기구가 들어온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지난 달보다 50%는 많아진 것 같다.
이유야 뭐가 되었건, 꾸준히 해서 해가 될 일은 아니니까 열심히 하길 바라지만 제발 러닝머신과 벤치 프레스 좀 길게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2.
최근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연애의 코치를 하고 있다.
축구로 말하자면 '골키퍼 있다고 골 안들어가는 법' 있냐는 선수에게 '한 골 먹었다고 이운재 바꾸는거 봤냐'고 말해주거나, 이건 축구지 야구가 아니니까 공을 손으로 던지더라도, 드로우인 일 때만 던지라는 조언을 해주는 역할이다.
어쩌다 이런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이건 어쩌다 사우디에 가서도 쫓겨날 걱정을 하게 되었는지 모를 이천수와 입장이 같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역할에 부담을 느끼지는 않는다. 선수에 대한 애정이 있으니까 이들이 어떻게든 골 한번 제대로 넣기를, 그래서 멋진 골 세러모니로 내게 청첩장이라던가, 하다못해 100일 기념 파티에 초대하기를 바라는 심정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신문선 해설가의 명언처럼, '공은 둥글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게 축구이듯이, 연애의 경기도 아무리 노력해도 때때로는 안풀리고 간혹은 콜드 게임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선수는 '연애 게임'에 밀려나, 다른 구단(즉, 다른 상대)를 알아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엔 다음 경기까지 잠잠히 기다리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선수에게 있어선 힘든 상황이 좋은 상황보다 더 많이 있는 듯히다. 적어도 요즘 내 주위의 연애계 '선수'들에게는 말이다.
3.
최근 3주동안의 토/일요일마다 나는 빠지지 않고 영등포 신세계백화점, 롯데 백화점, 그리고 타임스퀘에 나갔었다.
운동화를 사기 위해서이다.
군대 제대하고 산 걸로 기억하는 반스 운동화가 이제는 더 이상 신고 다는게 민망해질 정도 닳아빠져서 새로 사기 위해 마음을 먹은 날 부터 매 주말마다 영등포를 돌아다녀왔다.
아디다스에도 가봤다가, 나이키에도 갔었다가, 반스에, 퓨마에 ... 적어도 영등포에 깔려있는 모든 신발은 정말이지 거의 다 신어보고 거의 다 만져본 것 같다.
결국 나이키 에어맥스로 사게 된 것이 오늘의 일이 된데에는 그동안 이런 저런 모양과 실용성 등을 고려하는 시간이 좀 길었다. 또, 당장 급한게 아닌 이유로 신발 보러 갔다가 청바지 하나 사 오고, 어느 날은 엄마랑 굴짬뽕이나 먹고 오는 한량의 쇼핑을 즐기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최근 몇 주동안의 영등포의 백화점과 타임 스퀘어에는 정말로 사람들이 참 많았다. 다들 나처럼 닳아빠진 운동화나 티셔츠를 사려거나 아니면 밥 하기 싫어서 대충 외식하러 나온 가족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말이지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다. 그게 버커루 매장에서 탈의실에 들어가기 위해서만도 여닐곱 명은 기다려야 했을 정도였다.
4.
핼스 클럽에 사람이 늘었다. 그것도 갑자기.
연애를 갈망하며 이래저래 시도하는 선수들이 많아졌다. 그것도 갑자기.
영등포 일대의 쇼핑몰에 뭔가를 사기 위한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것도 갑자기.
연관이 없어보이는 이 세 가지 경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괜히 핼스 클럽에 사람이 늘고, 괜히 연애 선수들이 많아지며, 괜히 쇼핑몰에 사람들이 북적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게 다 겨울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겨울이 지나고, 이제 곧 봄이 올 거라는 걸 사람들이 이미 살갗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한두살바기 어린 아이가 아닌 이상, 대체로 봄이란 이래야 된다, 혹은 이렇더라 하는 사적인 통계들을 다들 가지고 있을 것이다.
봄이 되면 옷이 얇아진다. 그동안 오리털로 가리고 있던 오리같은 배를 더이상 감출 수가 없다.
봄이 되면, 놀러가고 싶어질 것이다. 봄은 그런 계절이니까. 바로 그 때, 솔로이기 싫다. 아, 그것은 재앙이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과 쌍을 이루어 '솔로 천국 커플 지옥'을 써붙이고 싸돌아다니는 광년이가...... 어쩌면 내가 될 수도 있다. 위기는 기회다.
봄이 되면 작년에 입었던 모든 옷은 눈과 함께 증발해버린다. 벌거숭이로 나다닐 순 없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 아닌가! 동물도 털갈이를 하는데 사람이 옷갈이 좀 한다고 흉이 될소냐? 옷이든 엠피쓰리든 봄은 소비한 결과를 보여주는 계절이다.
아마 이런 생각들이 있는게 아닐까 싶다.
나는 이제 이렇게 기도하며 잠을 자야겠다.
오, 주여! 봄맞이 근육쟁이에겐 추노꾼같은 갑빠를, 봄소풍 대비 연애 선수들에겐 적당한 짝을, 봄 쇼핑 매니아들에겐 좋은 상품을 주시옵소서.
저는 봄이 오는 소리를 즐겨 듣겠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