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회 후기] 영도다리 - 부산에 대한 기억, 그리고 몸의 기억

2010. 6. 28. 00:17그냥 짧은 순간들

1. 부산에 대한 기억

나는 한반도의 육지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제주도도 가보지 못한 촌놈이다. 정말이지 그 흔한 제주도도 말이다.

그렇지만 내륙지방은 틈나는대로 여기 저기 많이 돌아다녔다고 자부하며 지금까지 어디를 다녔는지 생각해보니, 그게 전부 연고가 있는 곳과 멀리 않는 지역에 국한되어있다. 이를테면, 전라도라던가, 충청도 일부, 그리고 아주 드물게 강원도.

그러니까 나는 (경상도 사투리를 싫어할뿐더러) 그 쪽에 연고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 지역은 한번도 가본 일이 없다. 그래서 하늘이 내게 기회를 준 것인지, 군인이던 시절에 우리 중대에는 경상도 출신이 많았다. 군대의 특성상, 싫은 이야기를 많이 듣기 마련인데 밤마다 경상도 사투리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선임병들 탓에...나는...




경상도 사투리를 아주 많이 싫어하게 되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경상도 사투리를 완전히 잊어버리게될 때 즈음에,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고 내용인즉, '부산에서 결혼을 하는데 사회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쿨한 도시남자처럼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해놓고는 아, 잠깐... 장소가 어디라구? 부산? 이런...경상도잖아? 아니 왜 서울 놈이 부산까지 가서 결혼을 하는거냐? 고 투정을 늘어놓고 말았다.

친구의 결혼식날,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혹시나 혀가 굳을까봐 입과 혀를 오두방정떨며 도착한 부산역에서 나는 실로 몇년만에 부산 사투리의 공격을 받아야했다. 도무지 어떤 말을 해도 시비를 거는듯한 그 쪽 사투리는 설령 페넬로페 크루즈가 다가와서 유혹을 하더라도 대꾸도 하지 않고 도망쳐버리게 만들만큼 네거티브한 맛이 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부산의 사투리 억양은... 뭐랄까? 부부젤라를 부는 백만명의 부산 시민과 만난 정도라고 해야할까?

뭐, 여하튼 역시나 부산 사투리로 점령당한 - 심지어 주례 선생님까지도 부산말로 이야기하는 제3세계에서 무사히 사회를 끝낸 나는, 부랴부랴 서울로 오기 위해 다시 부산역을 찾았다. 그리고 출발시간까지 1시간 반 정도를 기다려야했기에, 같이간 친구들과 부산역 주변을 어슬렁거렸는데, (사실 나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장황하게 글을 쓴 것이다) 부산역 앞, 국제 시장 언덕길을 올라섰을 때 바라보이던 바다가 나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사실 나는 군산, 정동진, 서천등의 바다는 무수하게 봤었지만, 부산의 바다는 그 쪽과는 차원이 다른 '어떤 것'이었다. 저 멀리 이름과 용도를 알수 없는 대형 선박 비슷한 것들이 떠있고, 그 앞으로 도시의 네온사인이 반짝이고 다시 그 앞으로 사람들과 버스가 다니고, 부산역이 있는 풍경 말이다. 그러니까 그 곳은 내가 경험했던 바다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말 그대로 진짜 제3 세계의 바다.

부산이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였다니! 나는 그 날 친구들에게 결혼식장에서 보다 윤기있는 발음으로 부산이란 도시에 홀딱 반한 연애의 언어를 털어놓았던 기억이 난다.





2. 영도다리

인디플러그에서 하는 시사회를 처음으로 가게 되었다. 영화 <영도다리>를 보러...

앞서서 몇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시간과 장소가 애매해서 늘 아쉬었던 참에, <영도다리> 시사회는 마치 내게 기회를 주듯 시간과 장소가 적당하게 맞아떨어졌다.

음... 우선, 이 글을 읽는 분들께 간단하게 몇가지 단어들을 제시할테니 무엇이 연상되는지 살펴보시길 바란다.

<19살>, <미혼모>, <입양>

딱 이정도만 가지면 뻔하다. 불량 학생이 조심성없이 임신을 하게 되고, 결국 키울 능력이 없어서 입양을 보내는 내용. 누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평범한 추리일 것이다. 그리고 영화 <영도다리>의 내용도 이런 연상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의 미덕은 무척 뻔할 수 있는 소재를 담담하게 그려내는 데에 있다.

19살의 미혼모(안타깝게도 극중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가 출산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는 형편이므로 아이를 키울 능력이 없다. 그리고 병원에서 준 탯줄도 변기에 넣어 버려버릴만큼 아이에 대한 애정도 없다. 자신이 엄마라는 인식도, 아이가 자기의 뱃속에서 나왔다는 인식도 없다. 더워서 콜라 사먹고 다 마시면 버리듯이, 임신했으니까 낳았고 낳았으니까 입양을 보낸다.

그 과정에서 미혼모에게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다. 도서관에서 책 빌리듯 입양 서류에 싸인하고 간편하게 퇴원을 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녀의 일상은 이미 예전과 같지 않다. 입원기간동안 아르바이트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졌고, 여기저기 구직활동을 해보지만 여의치가 않다. 게다가 자신의 몸에서는 이미 처분해버린 아이에 대한 흔적이 끊임없이 발견된다. 제왕절개의 흔적이라던가, 모유가 흐르는 장면은 미혼모의 의식과 무관하게 몸이 반응하는 아이의 흔적을 잘 표현해준다.

마치 잘려진 신체의 일부를 몸이 기억해서 그 부분이 아픈 것처럼 느끼는 상상통과 같이, 몸은 아이의 존재를 기억하고 아이를 위해 반응한다.

바로 이 시점부터 영화는 미혼모를 둘러싼 세계의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고등학생들의 폭력, 알콜중독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폭력 등... 하지만 카메라는 이들의 폭력에 어떠한 방점을 찍지 않고 담담하게 보여줌으로서 객관화된 폭력을 관객에게 체험하게 한다. 제3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폭력은 비단 관객 뿐만이 아니라 주인공도 마찬가지이다. 시종일관 미혼모는 폭력을 당하거나, 행사하는 쪽의 일방에 서지 않고 매우 관찰자적인 태도로 대한다. 어쩌면 그들의 폭력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다시 자기 몸에 새겨진 아이의 흔적을 어루만지는 장면을 분수령으로 영화는 그녀가 아이를 찾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쪽으로 그려나간다. 그러니까, 폭력에 무감각해진 그녀와 그녀의 세계에 관하여 드디어 영화는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여 '미혼모? 입양? 그런 일은 늘 그냥 있는거야. 한 두명도 아니잖아? 고등학생들의 집단 괴롭힘? 아이를 때리는 아빠? 그런것도 늘상 그냥 있는거야. 그런거 어디 한두번 보나?'는 식의 태도에서 드디어 적극적으로 폭력에 항거라도 하듯이 시점을 달리하여 보여주며 영화의 템포는 이 시점부터 빨라진다.

자세한 과정은 생략되어있지만, 결국 아이가 입양된 스위스의 마을로 찾아간 주인공은 아이를 입양한 새 엄마 앞에서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영어로 이야기하려고 하지만 눈물이 나서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한다. 그저 I came...I came...I came...만 반복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대사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I came from Pusan이지만, 실제로 주인공의 대사는 I came...에서 끝나고 만다. 이 말은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결국 이 대사는 아이를 향한 미혼모의 외침일 것이다. '아이야 내가 왔다'고 말이다.





3. 부산과 영도다리

영화가 끝난 뒤에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언제나 그런 자리는 어색함과 진행자의 일방적인 질의응답으로 끝나기 마련인데, 이번 자리는 제법 활기차게 진행되었다.

감독님의 대답을 듣는 중에, 나는 비로소 영도다리가 부산에 실제로 있는 다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약간의 배경설명과 함께 말이다.

감독님의 설명을 들어보니, 원래 영화제목은 <심장의 기억>으로 하려고 했다가 최종적으로 <영도다리>가 결정된 모양인데 나는 전자가 더 나을뻔 했다는 생각이다.

몸이 기억하는 것을 지우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앞서서 상상통을 이야기했지만, 굳이 그런 예가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이별을 경험해본 모든 이가 공감하겠지만, 이별 직후에 늘 그녀의 손이 잡혀있던 곳에서 느껴지는 허전함이나, 그녀의 팔이 얹혀있던 팔뚝의 허전함은 마음에서 오는게 아니라 실제로 몸에서 오는 기억의 반응이 아니겠는가?

미혼모의 문제는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영화 <영도 다리>는 담담하게 잘 그려주고 있다. 주인공이 아이를 만나거나, 아이를 데려오는 장면없이 그냥 아이가 있는 집 앞에서 I came으로 끝나는 장면이 어색하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그런 부분은 충분히 영화가 열어놓은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뒷 이야기는 우리와 우리 사회가 만들어갈 몫일 것이다.

아차, 그리고 나는 조만간 혼자 부산을 다녀올 생각이 있었다. 거기에 아무 연고가 없지만, 다시 부산역에 내려 국제시장의 골목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오고 싶은 충동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리고 조만간 부산에 내려가게 되면 영도다리도 한번 가봐야 하겠다. 이래저래 내게 부산에 대한 기쁜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사진은 멀찌감치에서....아이폰으로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