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행, 회현시범아파트] 회현 시범 아파트에서 눈에 멍든 사진을 남긴 사연

2010. 3. 8. 09:57서울여행 큐레이터

1. prologue
벌써 7년 정도 지난 일이다. 2002년 여름, 나는 대안학교 여름캠프 봉사자 자격으로 2주동안 변산에 다녀온 일이 있다.

그 곳은 윤구병 선생이 세운 대안학교와 공동체 마을인데 나는 변산에 머물던 2주동안 대안학교보다도 공동체 마을의 모습에 더 큰 인상을 받았다.

지금은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마을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아니, 이름이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공동체 마을이라도 부르는건 오직 내가 받은 인상 때문이다.

변산 시내에서 시외 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 쯤 들어가면, (변산이란 지역이 그다지 넓지는 않은 것 같은데, 차량의 왕래가 거의 없는 도로를 한 시간이나 내달린 곳도 역시나 변산이라 불리는 마을이었다.) 바다와 근접한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있다.

그리고 그 마을 한 켯에 우리가 머물던 대안학교가 있었고, 뒷 쪽 산을 올라가면 서너집이 모여있는 주거지가 보이는데 여기가 바로 내가 이야기하려는 공동체 마을이다.

이 곳에선 모두가 일하고 모두가 나눈다. 같이 일하고 같이 휴식한다. 또한 모두의 밭이자 모두의 수확물이다.

아침이면 알아서 일어나, 자발적으로 나누어 맡은 일을 하고 각자가 알아서 공동으로 사는 집에 모여 점심을 먹고 알아서 정리한 후에, 적당히 시원한 자리를 골라서 막걸리를 마시거나, 잡담을 하거나 혹은 낮잠을 잔다.

어떻게 보면 거기에 모여 사는 삼십여명 되는 분들이 전부 한량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른 관점에선 '신선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다들 어떤 이유로 마을에 들어와서 사는지는 서로 묻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곳에서의 생활은 바쁘고 쫓기는 일이 전혀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때는 내가 어려서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 마을의 가장 큰 장점은 '모두가 하나'라는 점이었고, 그래서 '공동체'라는 점이었다.

요즘 공익광고에서 '함께하자'는 말을 유난히 강조하는데, 그 함께라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는 변산의 마을이 잘 대변해주고 있다.








2. 회현 시범 아파트
처음부터 이 아파트를 가려던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4호선 회현역에서도 남산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정보를 얻어서 그냥 따라 올라가려고 했던 것이 이 아파트와 처음 만난 인연이다.

2년쯤 전이었던가.... 생일날 나는 어쩌자고 그랬는지, 술을 진탕 마시고 말았다. 그 날은 알콜 램프에서 알콜을 따라줘도 그게 술인 줄 알고 마셨을 정도였다.

종로에서 술을 마시다, 늦게 친구가 온다길래 마중을 나가겠다고 술집 문을 나가다가... 정말이지 청결함이 도에 지나치도록 유난을 떤 직원 덕분에 마치 유리갤러라도 되는 듯,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마법의 유리로 통과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실패로 끝나고 말면서.... 눈이.....



멍들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술을 진탕 먹고 늦게 오는 친구를 데리러 나간다고 술집 문을 나서는데 열려있는 줄 알고 그냥 나가려다가 유리문에 눈을 부딪히면서 ........

멍이 든 것이다.

그 후로 며칠동안 꼼짝없이 집에 있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게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멍든 눈(이 쪽팔린줄 알면서도) 정도야 어차피 길가에서 만나는 사람들, 두 번 볼 건 아니니까 괜찮다고 우겨가며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대강 버스를 타고 회현 역에서 내려, 남산 방향으로 올라가다보니, 멀리에 생선집, 또는 야채 가게, 아니면 동네 슈퍼 쯤 되어보이는 가게가 나타났다. 물론  이 길이 과연 남산으로 이어지는지 심각한 의심을 만들어내는 그런 분위기로 말이다.

일단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서 캔 커피 하나 달라고 밑밥을 던진 후에, 주변을 쓱 둘러보니 거긴 생선집이거나 야채가게 아니면 슈퍼로 오인될 곳이 이나라 정확하게는 [생선집이자 야채가게이며 당당하게 슈퍼]인 상점이었다.

"아줌마, 여기로 올라가면 남산나와요?"로 시작한 나는 결국 "그런데 그 눈은 왜 그러냐"는 질문을 받아서 아주 재치있게 멍이 들어서 그렇다는 당연한 대답으로 이어가며 결국 이렇게 사진을 한 장 남길 수 있었다.


잘 보면 지금보다 훨씬 나이들어 보이는 내 얼굴에 아직 남아있는 멍이 보인다.


이렇게 인연을 맺은 덕분에 종종 회현 시범 아파트로 사진을 찍을 겸, 인사도 드릴겸하여 올라가게 되었다.




모두 니콘 FM2, Ilford 100(B/W)으로 찍어서 필름 스캔한 사진이다.

나는 이 사진을 통해서 구속, 억압등의 감정을 부추기고 싶지 않다.  보통은 이런 사진에서 그런 느낌들을 강요하는데, 물론 보는 분들께서 그런 느낌을 가지는 것이야 당사자들의 감정이겠지만, 굳이 캡션을 달아가며 그렇게 보여주기는 싫다는 것이다.


이 사진은 애초에 그렇게 찍힌 사진이 아니라, 감도 100의 필름을 넣어서 나간 길이 여차 저차하며 늦어지는 바람에 날이 어두워졌었다. 이왕 간 김에 뭐라도 찍어오고 싶은데 빛은 없고 감도는 100이다보니, 촬영 상황을 고려해서 조리개를 최대로 열었기 때문에 이렇게 찍힌것이다.



[니콘 FM2, Ilford 100(B/W).필름 스캔]

이 사진은 다른 날에 가서 찍은 건데, 노출이 충분히 확보된 날이었다.




이 장면은 너무 유명해서 달리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니콘 FM2, Ilford 100(B/W), 필름 스캔.






[니콘 FM2, Ilford 100(B/W).필름 스캔]

소나기가 내린 직후에 갔더니, 물이 고여있었다. 어딜가나 이런 발자국은 꼭 있기 마련이다.

나는 이 사진을 찍으면서 아마 달에도 인류 최초의 발자국이 꼭 저런 식으로 찍혀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옥토끼와 금토끼가 무지하게 욕을 했겠지..... 발자국 찍고 [토낀]놈 누구냐고....







[니콘 FM2, Ilford 100(B/W).필름 스캔]

어느 무료한 휴일의 오후였을 것이다. 무료한건 나뿐만이 아니었나보다. 주민께서 담배를 피우러 나오셨다.









[니콘 F5, Ilford 100(B/W).필름 스캔]


어딜가나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은 나는......(잠깐만.... 여긴 내 블로그니까....적어도 내 맘대로 쓸 자유는 있는거라고) 노소를 가리지 않고 통하는가 보다..........고 쓰려다보니 사실을 말해야 할 것 같은 양심의 소리가 들려온다.

200mm 렌즈를 들고 나간 날이었다. 해가 뉘엿거릴 즈음에 아파트에서 나와 남대문 시장 쪽으로 걸어내려가는데 뒤에서 한 무리의 방청객 데시벨의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로 이런 경우엔 아이들일 확률이 100%다.

뒤를 돌아보니, 저 꼬마 아이가 친구들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고 있길래 몇 걸음 다가가서 꼬마가 멈출 때를 기다려 렌즈를 들었는데, 카메라를 발견한 꼬마가 갑자기 수줍게 웃으며 얼굴을 가리고 주저앉아버렸다.

덕분에 나는 이 사진을 찍었고, 이 꼬마는.......








술래가 되었다.












[니콘 F5, Ilford 100(B/W).필름 스캔]

시범 아파트에는 길고양이들이 많이 산다.  아마도 동네 분들께서 남는 음식 등을 종이 접시에 담아서 먹이로 놓으시기 때문에 소문 듣고 모여든 골드러쉬 - 프론티어 냥이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 중에도 쎈 놈과 약한 놈이 존재한다. 이 날은 참치 캔이 통채로 놓여있었는데, 그 주위에 유치부 냥이들이 모여 먹고 있는걸 어느새 덩치 큰 놈이 나타나 뺏어먹는 걸 보았다. 사진에 찍힌 냥이는 잠시 자동차 바퀴 뒤로 몸을 숨긴 놈이다.

나는 이 사진을 찍기 위해 신병 교육대 낮은 포복 훈련 1위답게 적에게 들키지 않는 자세로 엎드려 겨우 한 장을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정의로운 나는 큰 놈이 반쯤 먹었을 때, 그 놈을 도망보내고 유치부 냥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니콘 F5, Ilford 100(B/W).필름 스캔]

자동차 타이어 뒤에 은신하며, 나를 노려보던 냥이이다. 원래는 친구들이 몇 놈 있었는데, 내가 콘트리트에 엎드려 요지부동하니까 우습게 보였는지 아주 조금의 경계도 하지 않고 내 옆을 유유하게 걸어서 지나갔고 이 놈만 아직 경계를 풀지 않는 상황이었다.








[니콘 FM2, Ilford 100(B/W).필름 스캔]

한 여름이었다. 여기는 회현 시범 아파트는 아니고 바로 옆에 있는 맨션 마당 사진이다. 시범 아파트 놀이터와 맞붙어있다.














3. 할아버지

[니콘 F5, Fuji autoauto 200.필름 스캔]


재작년에 나는 운 좋게도 EBS 창사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서울을 찍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프로였는데 그 중의 한 명으로 내가 나가게 된 것이다.

나는 몇 개의 포트폴리오를 제출했었는데, 그 중에서 남산 회현 아파트와 만리동 사진들이 선택되어서 두 군데에서 녹화를 했었다.

만리동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남산 회현 시범 아파트에서 내가 녹화한 것은 사진의 할아버지께 내가 찍은 이 사진을 인화해서 가져다 드리는 에피소드였다.


봄비치고는 심하다 싶을만큼 내리던 어느 5월에, 나는 회현 아파트에 갔었다. 비가 와서 야외에서 사진은 찍을 수가 없었고 그냥 간 김에 슈퍼 아주머니께 인사나 하려고 올라갔는데 아파트 현관에 이 분께서 앉아계시는 걸 보았다.

나는 또, 낯선 분들께, 심리적으로 제일 친절하게 들린다는 '솔'음으로 인사하는걸 잘한다.

하지만 낯선 이에겐 나도 낯선 법.


'웬 놈이 인사를 하나?'하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시고는, 어디서 왔으며, 왜 왔으며,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정도로만 끝날 줄 알았던 수다는 줄구장창 이어졌다.


그러니까 이 사진이 조금 어둡고 쓸쓸하게 찍혀서 그렇지, 사실 이 할아버지는 말씀을 하는 걸 즐기시는, [老홍철]님이셨던 거다.






아파트 내부 사진인데, 이런 장면은 내가 아니어도 이미 사진이 많다.










4.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

민중가요중에 '함께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는 노래가 있다. 나는 이 노래를 즐겨 부르는 세대가 아니지만, 대학생때나 지금도 가끔씩 술 마시면 부르는 노래이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투쟁 속에 동지 모아 /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동지의 손 맞잡고 /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 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 주자 / 해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주고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 ]



EBS 프로그램 녹화할 때 위의 할아버지 에피소드를 촬영하고, 슈퍼로 내려갔다.

나와 슈퍼 아주머니의 인연이 재밌어서 슈퍼도 둘러보고, 동네 마실방 역할을 하는 그 곳에서 주민분들도 만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나서 주민분들과 자연스럽게 인터뷰가 이어졌는데, 대체로 주제는 조만간 아파트가 헐리면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 즈음에 마침 이 분들이 서울 시청 앞에서 항의성 시위를 하고 오신 직후라서 적절한 소재였다.

PD님이 다각적인 측면에서 질문을 해나가자 슈퍼에 모인 분들은 저마다 의견들을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서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 부분이었다.

'이제 아파트가 헐리면, 다들 이사가셔야 할 텐데, 어디로 가실 건가요?'
'우리는 그렇게 따로 따로 , 한 집 한 집 떠나는거 원하지 않아요. 우리가 원하는건 여기 주민 모두가 지금처럼 다 같이 살 수 있도록 국가가 조치해주는거예요. 여기 주민들 전부 다 정들었는데 어떻게 헤어져요. 우리는 어디라도 좋아요. 서울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다 같이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는 대답.

그리고, 그 말에 전부 수긍하시는 주민들.

재개발과 관련해서 늘 원주민 이주 문제가 그야말로 [문제]가 된다. 그 안에서 소위 '딱지' 문제와 보상비용 문제등으로 주민들끼리 반목해서 관계가 틀어지는 경우가 빈번한데 반하여, 시범 아파트의 주민들은 참으로 소박하게 [서울이 아니어도 같이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해달라고 하셨다.

나는 바로 여기에서 공동체 정신을 발견했다. 우리가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자고 아무리 외친다고 한들, 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도시 발전의 거대 담론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작은 이야기와 작은 마음들, 그리고 작은 사람들을 보듬어주고 관심으로 귀기울이는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가족이 공동체의 모범이 되고, 회현 시범 아파트처럼 이웃끼리 공동체를 이루면 사회 통합은 큰 노력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국가가 작은 사람들을 시선 밖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에 큰 사람을 위한 큰 건물, 큰 경제만을 세운다면 함께가는 사회는 큰 사람끼리 함께가는 사회가 될 것은 분명하다.


어딜 가든 같이 가고 싶은 이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며, 하루라도 빨리 어디라도 함께 하고 싶은 서울 시민이 되기를 바라며 나는 오늘도 서울을 여행하러 다닌다.








1. 회현역 1번 출구를 나오면 회현동 주민 센타 가는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출구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된다. 거기서 중시 약국이 나오면 다시 오른쪽 골목으로 쭉 들어가면 중간에 남산 가는 표지판이 나온다.

의심하지 말고 올라가면 맨 위 사진의 슈퍼가 나타날 것이다. 나와의 친분도 생각해서 캔 커피 정도는 하나 사주시길 바랍니다.

오르막 길이므로 하이힐은 위험. (또는 조심. 뭐 내가 안신어봐서 모르겠다만, 여자 중엔 힐 신고 치타 잡으러 가는 원시부족 사냥꾼마냥 뛰는 분들도 있긴 하더라만....)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20여분 걸린다.


2. 남산 도서관에서 남대문 시장 쪽으로 내려오는 버스를 타면 백범광장 (남대문 시장 한 정거장 전)에서 내려서  남산 쪽으로 5분 정도만 걸어 올라가면 된다.

워낙 [가는 길 사진] 찍는데 인색해서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아파트다 보니 슈퍼마켓이 두 개나 있다. 될 수 있으면 나와 사진 찍은 슈퍼마켓을 이용해주기를 바란다.
아파트 관리 사무실 왼편에 하나가 있고, 그 옆으로 나있는 계단 아래에 아주머니가 하시는 슈퍼마켓이 있다.

이 밖에 남대문쪽으로 내려오면 무엇을 원하든 다 있다. 도심 한 가운데니까...



제발 부탁하건데, 타인의 삶의 현장을 존중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가끔 가보면 이 곳에 대형 렌즈 몇 개씩 들고 떼지어 오는 분들 계신데, 굳이 망원 렌즈를 가져갈 거면 혼자가서 조용히 찍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사는 곳이 무방비로 노출되는 걸 좋아하실 분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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