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행, 남산] 그많은 남산 이야기는 전부 어디로 갔을까?

2010. 4. 22. 11:35서울여행 큐레이터






1. 남산은 거기 있다.

아주 어릴 적에 나는 어느 일요일 아침에 할머니 할아버지 이하 가족들과 아침 밥을 먹다가 당연하다는 듯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따가 동물원에 가요"

"왜? 뭐 보고 싶은게 있어?"

"갑자기 용이 보고 싶어요"




그리고 나서, 용이 어떻게 동물원에 있냐는 가족수 곱하기 서너마디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차, 용은 거기 없지...'하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그 날 이후부터 나는 용을 꼭 보고 싶다.

우리 할아버지는 퇴임 직전의 몇년 동안을 지방에 계셨기 때문에, 할머니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나를 시골에 데려가셨다가 한 달 정도 뒤에 서울로 데려다주시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셨다.

아무래도 혼자 계시기 심심하시니까, 남아선호사상의 선두 주자였던 할머니로서는 [손자] 자랑 좀 할겸, 말상대도 할 겸해서 데리고 다니셨다.

집안 이야기가 주가 아니므로 생략하지만, 어릴 적에 할머니를 따라가면 그야말로 왕궁에 사는 왕자가 되어 살았었다.

다만, 주변에 또래 친구가 없어서 과학동아같은 잡지를 보거나 밤 늦도록 TV를 보곤 했는데, 주말의 영화가 끝나고 마감 뉴스까지 끝나면 전 국민을 수면에 빠뜨리는 애국가가 나오던걸 기억한다.(지금도 나오는지 모르겠다. 우리집은 현재 TV가 안나온다. 그런데 아무런 불평없이 잘 살고 있다)


"동해물과 (중략)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저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동해물과 백두산 그리고 남산 위의 저 소나무들을 떠올리며 내가 그런데를 아는가? 하고 생각해보곤 했는데, 동해하면 거의 매년 갔었던 바닷가, 백두산하면 북한이니까 못가고....하다가 남산? 남산이 어디지? 하는 생각에 닿게 되었다.

그리고 용을 보러가자는 듯이, 남산을 보러가자는 제안을 했었다.

'할머니 우리 남산에 가요'

'남산? 지난 번에 가봤잖아?'

'내가 언제요?'

'케블카 기억안나? 케블카?'
(케이블카는 케블카로 발음해줘야 진짜로 타 본 사람처럼 보이는 이상한 믿음이 생긴다)



그렇다. 설명을 듣고 보니 케블카를 타고 올라갔던 곳이 애국가에 나오는 남산이었다. 그리고 어린 나는 애국가에 나오는 [그 남산]을 가본 것이 자랑스러웠고, 그런 산이 있는 서울에 사는 내가 자랑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 지방에 살던 애들이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면 늘 애국가를 2절까지 불러주고 [그 남산]이 있는 서울에서 왔다고 설명해줬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의 나는 의외로 스마트해서 애국가는 4절까지 외웠었다. 만약 그게 이유가 아니라면 우리 집안이 전부 공무원인 탓일 것이다)


......

 

남산 포스팅을 하겠다고 공언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 사람은 역시 그런 짓을 하면 안된다는 걸  절절하게 느끼고 있다.

어디서 술을 마시다 저 쪽에 남산 타워가 보이면, 이 글을 약속한 게 생각나서 술 맛이 저하되고 그리하여 술을 덜 마시게 되고  결국 안취해서 집에 오는 (이상하게) 긍정적인, 그러나 마음이 무거운 효과를 체험했다.

이 글이 여러모로 늦어 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러 개 있지만, 무엇보다도 자료를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남산에 대해선 이것 저것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리고 아래 사진들처럼, 내 유년시절 개나리같은 날들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 때문에 가볍게 포스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사진 속의 너무 귀여워서 깨물어 [죽여버리고 싶은] 사내 아이가 바로 나다.

과감하게 용을 보러 동물원에 가자고 이야기했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다.

사진이 아니었다면 전혀 기억나지 않는 시간...

언제 남산을 갔었던가 싶다.

노란 장화를 신고 있는 남자애는 동생이다. 지금은 나보다 무려 8센티가 더 커버렸지만, 한 땐 저렇게 만만하게 작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국내 유일의 회전 전망대]라는 남산 타워 앞에는 미키 마우스가 있었나보다. 그리고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미키 마우스 뒤로 가격표가 있는데, 사이다 500원, 콜라 500원, 쥬스 700원으로 적혀있고 가격은 보이지 않지만 프라이드 치킨과 맥주도 메뉴에 적혀있다.

사진 옆에 적힌 날짜를 보면 83년 2월로 되어있다.

80년대의 남산이란, 그러니까, 어딘가 어색한 미키마우스와 굳이 산위에 옮겨놓은 놀이터, 그리고 국내유일의 회전 전망대에서 500원짜리 콜라를 마시는 그런 모습이었나보다.









이 사진도 같은 날에 찍은 사진인데, 저 뒤로 팔각정이 보이고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보인다.

그런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조형물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 형제는 왜 카메라를 안보고 다른 쪽을 보고 있는 걸까? 더구나 내 동생은 손에 뭘 쥔거야?








이 사진은 미키마우스 손가락 높이만큼 키가 자랐을 때 일 것이다.

어느 휴일에 우리 가족은 [또 남산에] 놀러갔었던 모양이다.

아...... 이 사진도 역시나 기억이 안난다. 다만, 우리 가족은 남산 식물원에 자주 갔었던 기억은 가물가물하게 떠오르니까 아마도 이 날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남산 식물원.

지금은 없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이 사진이 얼마나 귀한지 실감이 된다.

나는 지금도 체크 무늬 셔츠를 좋아하는데, 이 사진으로 미루어보아 어릴 적에 많이 입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옆에 있는 분은 엄마이다. 아마 30대 중반쯤의 모습일거다.

남산 식물원...하면 나는 몇 가지 떠오르는게 있는데 첫번째는 온실효과 덕에, 무지하게 더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짜증이 났었고,

그래서 식물원 앞에서 늘 음료수를 찾곤 했는데

그래서 식물원 출구에 있던 슈퍼는 늘 사람이 붐볐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안에만 들어가면 공기 속에 이상한 냄새가 떠다니곤 했었다.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약간 불쾌하고 약간 새로운 느낌이었다.



......................




이렇게 시간은 흘러서 우리 가족은 각자의 생활이 바빠졌다. 아빠는 학교 선생님들과의 시간이 많아졌고, 엄마는 뒤늦게 사진을 배운다고 온 시간을 쏟았다. (결국 한국 사진 작가협회에 등록한 진짜 사진 작가가 되었지만) 동생은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나는...





나는 그럭 저럭 혼자 다니는 걸 좋아했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캐논 EOS 필름 카메라가 있었다. 그 때엔 최신형이었는데, 아빠가 야심차게 사놓고 방치해둔 걸 엄마가 발견하여 사진에 입문하는 계기를 열어주었으나, 엄마는 무슨 일인지 니콘으로 장비를 갖춰가면서 남겨진 EOS는 내 차지가 되었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내가 남산을 특별히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옛 사진들을 찾아보니 남산에서 찍은 컷도 상당히 많았다. 나도 모르게 은밀히 남산을 좋아하고 있었나?





요즘도 이런 화가들이 남산에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약 10년쯤 전에는 남산 타워로 올라가는 계단에 초상화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져있었다. 이 사진도 내 기억엔 98,99년 즈음에 찍은거니까 충분히 그 시절의 남산을 엿볼수 있는 장면이 될 것이다.




비슷한 시기의 남산 분수대 모습이다.
지금도 분수대는 그대로 있지만, 남산 식물원이 사라졌다. 내게 습기의 기억을 남긴 채 말이다.






각각 촬영한 시기는 조금씩 달라서 가장 먼저 찍은 것과 가장 나중에 찍은 것은 1~2년 차이가 날 것이다. 하지만 이 사진 중에서 가장 최근에 찍은 것도 지금으로부터는 벌써 9~10년전이다.

지금과는 뷰가 많이 다를 뿐더러, 특히 이제는 봉화대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펜스가 설치되어 있어서 두번째와 세번째 사진같은 장면은 찍을 수가 없다.




아... 공개를 할까 말까 가장 많이 고민했던 사진들이다. 위에서 봉화대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래도 시쳇말로 인증샷이라도 올리기 위해 과감하게 자폭성 사진을 올린다.

먼저 왼쪽 사진은 (정확하게 기억하는데) 99년에 찍은 사진이다. 저 때 나의 별명은 빗자루, 사자갈퀴, (거기서 조금 엇비슷하게) 사자같지, 사자바퀴, 뒷머리 등등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그다지 나쁜 축에 끼지 않는 스타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설마 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건 아니겠지?)

나는 군대를 아주 늦게 갔다. 25살 9월에 입대해서 27살 9월에 제대했다. 정확한 연도를 밝히면 나이를 유추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이 블로그 딱히 인기가 없어서 거의 내 지인들만 보므로 상관하지 않고 밝히자면, 오른쪽 사진은 2004년의 모습이다. 사진엔 계급장이 안보이지만, 일병 정기 휴가 나왔을 때 찍은 것이다.

저 때, 동생이 운전해서 나를 데리러 부대까지 왔었다. 이렇게 말하니까 굉장히 전방에서 근무한 것 같지만 나는 서울에서 일산보다 가까운 원당 근방에서 근무했다. 부대앞에서 버스타면 한시간이면 충분히 집에 도착하는 거리였다만, 어느 집에서건 군대간 자기 아들이, 자기 형이 전군에서 제일 힘들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정기 휴가를 나온 첫 날, 전투복을 입고 남산에 갔다. 참으로 용기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는데 '마침 차도 가지고 나왔으니 어디 들려서 밥 먹고 가자'는 엄마의 제안에 나도 모르게 남산에 가자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아무래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남산을 좋아하고 있었나보다.

어쨌거나, 지금은 아무리 용을 써도 저 위치에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는 말을 하려고 말도 길어졌고, 사진까지 올리게 되었다. (사진을 잘 보면 왼쪽의 낙서들이 오른쪽에선 안보이는데, 서울시에서 낙서 지우기 사업을 펼친 덕분에 깨끗해졌다.)







2. 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 그리고 1968년의 만우절

이 글은 한 권의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강 출판사에서 나온 <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

제목에 [서울]이 들어가면 무조건 사고 보는 고집이 있는 나는, 정말 웬만한 서울 책은 다 가지고 있다.

어느 날, 모처럼 서점에 가려고 신간 서적을 검색하던 중에 이 책을 발견하였다. 이혜경, 하성란, 김숨 등의 쟁쟁한 작가들이 서울에 대해 쓴 소설을 한데 묶었다는데 상당한 매력이 있었다.

더구나 내가 책을 살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표지 디자인도 별 점 다섯개 만점에 네개 정도는 넉넉하게 줄 수 있었다.

이혜경 작가의 '북촌'으로 시작하는 서울 소설은 하성란 작가의 '1968년의 만우절'로 이어지는데, 바로 이 단편이 이 글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아버지가 죽음에 이르는 짧은 과정을 체험하면서, 아버지와의 추억을 회상한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나처럼 소설 속의 '나'도 남산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서 그 곳에서의 시간들을 떠올리고, 커다란 놀이터를 다시 기억해내며 아버지와 얽힌 장면들을 꺼내게 된다.


"서울은 만원이다"

그 때 아버지는 왜 그렇게 남산에 올라갔던 것일까?








아버지와 올랐던 남산을 시간이 흐른 뒤에 남자 친구와 다시 오른다. 마치 내가 가족들과 함께 올라가던 시절을 거처 혼자 슬슬 오르락 내르락 거리던 때를 지나서, 이제는 과거 또는 현재의 여자친구와 다시 남산을 오르듯이 말이다.


아버지가 서 있는 곳에 서있는 남자 친구를 바라보며 '나'는 다시 아버지를 떠올린다. 

시간이 몇 년 더 지나서 나도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그 놈을 데리고 남산을 가게 된다면 내가 서있는 자리에 서있었던 나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남산이란 아버지가 아들의 사진을 찍고, 가족의 사진을 찍느라 정작 자기의 젊음은 기록하지 못하지만 그걸로 만족하는... 한 가족의 역사를 기억하게 만드는 장소인 듯 하다.

어린 아들이 아버지가 되어 어린 아들을 다시 데려오는 세대를 거치며 가족을 기억해주는 공간, 그런 남산을 녹여내고 있는  이 단편을 그래서 나는 참 맘에 들고 따뜻하게 읽혀진다. 










3. 1968년에서 2010년으로







2010년, 삶은 내게 먼 길을 돌아 다시 남산을 만나게 해주었다.

이 글을 좀 더 진지하게 쓰고 싶은 욕심에 남산을 어떻게 찍어서 올릴지 고민하고, 사진의 장면을 구성한 끝에 선택한 시간은 하성란 작가가 단편에 적었던 바로 그 시간, 야경이 비치는 밤이었다.

나는 계단을 통하지 않고, 산책로을 따라 남산에 서서히 접근하는 사진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남산 타워를 케이블카를 타고 쉽게, 그리고 빨리 다시 만날 자신이 없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구불 구불 길을 돌고, 가파픈 고개를 오르고 걷는 나를  남산 타워는 환한 불빛으로 맞이해주었다.










83년 겨울, 카메라 보다  다른 곳에 시선을 금방 뺏겨버릴만큼 어린 시절에도 내 뒤에 서있었던, 팔각정은 지금도 같은 자리에 서있었다.

팔각정, 오랜만에 다시 본다.  어쩌면 너는 83년도의 내가 왜 카메라가 아닌 다른 곳을 쳐다봤는지 기억하고 있겠구나...





내가 남산에 사진 찍으러 갔을 때, 남산에 레이져쇼를 하고 있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아마 주기적으로 쇼를 하는 것 같았다.



레이져 쇼가 한창 진행중일 때의 사람들...




아마도 이 곳이 예전에 놀이터였을 것이다. 밝은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진에 노출을 조금 주고  찍어서 이렇게 보이는 것 뿐이고, 실제로는 굉장히 밝다.







이 작품은 굉장히 유명해서, 나 말고도 여러 사람이 찍어서 올린 작품이다. 아마 조금만 검색하면 백장에 가까운 사진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올린 소설에 H와 주인공이 남산에서 야경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이 본 야경은 아마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사진을 지금보다 더 못찍던 시절에 찍은 남산에서 내려다 본 야경이다.






그리고 이 사진들은 포토샵으로 만든게 아니라 같은 장소에서 하트 모양 필터를 만들어서 찍은 컷들이다. 노출시간과 촛점 거리만 조금씩 다르게 찍은 사진들이다.

나는 <1968년의 만우절>에 나오는 주인공과 H가 올라간 길을 따라 올라가기로 했다. 그러니까 명동역에서 내려 숭의여대 방향으로 말이다.








4. 소설과 함께 걷는 길


회현역에서 내려서 남산가는 출구로 나오면 벤취가 몇 개 있는 작은 쉼터가 있고, 그 자리에서 바라보면 저 멀리에 남산이 보인다.

자...상상해보자. '나'와 H가 걸어올라간 길이 바로 이 길이다.

최근 이 길에는 겉보기에 예쁜 커피집들과 밥집들이 많이 생겼다. 특히 커피집이 많이 생겼다. 오른쪽 사진에 보이는 남산 삼계탕을 지나 오른쪽 골목으로 올라가다보면 [전광수 커피집]이 나오는데 내가 즐겨찾는 곳이다.







가는 길에 만나는 커피 점들... 나는 전광수 커피집 말고는 가 보지 못했는데... 그건 다른 분들이 가보시고 댓글을 달아주시기를 바란다.











올라가는 길에 원색을 예쁘게 칠해놓은 건물이 있다. 용도는 잘 모르겠는데, 색이 이뻐서 찍어왔다.






여하튼, 이런 상점들을 만나며 걸어 올라가다 보면 달팽이 도로마냥 왼쪽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그리고 역시나 바로 그 코너에 [전광수 커피집]과 더불어 이 길에서 유명한 남산 커피집이 있다.


남산 커피집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서 올라가면 남산으로 이어진다.









나는 아래 사진을 마지막으로 이 글을 끝내려고 한다. 어떠한 맺음글 같은 것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남산과 나의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네버엔딩 남산 스토리...

나는 이 글을 통해서 나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게 아니다. 이 글과 사진들이 여러분에게 말을 걸기를 바란다. 그래서 여러분 안에 가지고 있는 남산의 이야기가 램프의 요정처럼 스르륵 떠오르길 바란다.

아마도 적어도 어린 시절을 서울에서 보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남산에 와봤을테고, 거기에 담겨진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각각의 이야기들을 남산은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서울 사람들의 추억을...그들의 시간을 말이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이 [남산, 서울의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다.

앞으로 남산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가기를 바란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나, 나나. 그리고 서울 사람들이 말이다.






어떤 이는 뛰고, 어떤 연인은 가위 바위 보로 계단을 오르고, 또 어떤 가족은 나들이 나왔다가 내려간다.

당신이 보고 있는 이 사진이 지금, 남산의 모습이라고 해도 틀린 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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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과 사진들  옆에 적힌 글자는 모두 서울남산체이다.
나의 옛 사진들은 인화물을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하여 올렸다.